병렬 독서 블루스
드라마 원작이 된 책도, 독서 모임을 위한 책도, 지금 읽는 책과 비교하고 싶은 책도,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렸을 때는 ‘병렬 독서’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대부분 한 번에 한 권만 사는 것이 당연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사게 되는 경우는 한 작품이나 시리즈가 한 질로 묶였을 때. 독서도 한 권을 마친 다음에 다음 권을 펼쳐야 다시 시작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도 좀더 커서 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씩 사게 되면서 자연스레 병렬 독서를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어렸을 때 읽는 책이야 대부분 동화나 소설이라 길어야 두어 시간에 해치울 수 있었기에 여러 권이 있어도 읽다 말고 다른 책을 집어들 일이 없었지만 다양한 관심사가 생기면서 인문서를 읽는 동안에 중간중간 소설을 읽는다든지 하게 된 것이리라. 책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되면서 반쯤은 직업 때문에라도 읽어야 할 책들이 늘어났고, 어렸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차피 읽는 시간은 똑같으니, 아니 오히려 한 권을 집중해서 읽고 다른 책을 읽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테니,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병렬 독서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실상 그 특별한 이유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이유로 읽고 싶어지는 책과 읽어야 할 책은 계속 늘어난다.
예를 들면, 당장 읽고 싶은 책도 있지만 드라마를 보다가 원작에 관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찜해뒀다가 나중에 읽으면 되지 싶지만 ‘다들’ 드라마를 즐겨 볼 때 얼른 원작도 읽고 드라마도 완주하고 싶다. 그런가 하면 독서 모임에서 정한 책도 읽어야 하고, 지금 읽고 있는 책과 비교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 작품도 재독을 위해 책꽂이에서 꺼내둔다.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한 책까지 합치면 ‘지금’ 읽어야 할 책이 열 권으로 불어나는 건 순식간이다. 읽을 책이 생기면 ‘지금 읽고 있는 책’ 옆 ‘대기 타석’에 세워두지만 그 자리도 언제나 포화 상태이다.
이제 습관이 된 병렬 독서는 가끔 예기치 않은 혼란을 주기도 한다. 이야기가 섞이는 것이다. 내 독서의 70~80% 정도는 미스터리 장르에 속하는데, 대부분의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가지만 가끔 비슷한 분위기나 설정의 스토리가 하나로 엉킬 때가 있다. 이 작품의 인물이 저 작품에 등장하거나 아예 두 작품의 이야기가 하나로 결합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머릿속에서도 다행히 각자의 자리를 찾는다. 그렇지만 인상이 흐릿한 작품의 경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원래의 작품은 증발하고 스토리나 인물의 일부가 다른 비슷한 작품 안에 흡수될 때가 있긴 하다. 이런 상황은 비단 책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스토리는 책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병렬 감상이 독서에 국한될 리 없다. 나는 만화도, 드라마도, 영화도 보고 있고, 이들은 모두 ‘이야기’를 갖고 있다. 책과 책만 합쳐지는 게 아니라 종종 책과 드라마, 드라마와 영화, 만화와 책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요동을 친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 순간의 즐거움만을 위해 읽는 책을 제외하면(만화나 드라마 등도 마찬가지지만), 언제나 책에 표시를 하고 따로 기록을 남긴다. 기록라고 해봐야 간단한 메모들의 종합일 뿐이지만 그렇게 정리까지 마쳐야 온전히 독서를 했다는 기분이 들고, 무엇보다 내 것으로 남는다.
병렬 독서의 단점이라면, 독서의 유효 시간이 지나버리거나 흥미가 떨어지는 지점에서 계속 독서가 뒤로 밀리거나 하는 이유로 아예 탈락되는 책이 생긴다는 점이다. 현재 읽고 있는 책들은 책상 한편에 모아두고 일정 기간 안에 읽기로 계획하고 있지만 언제나 끼어드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전자책! 독서 비율이 크지는 않지만 전자책은 병렬 독서에서 소외되기 십상이다.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앱을 지속적으로 열지 않으면 마지막 읽기 상태 그대로 시간이 훌쩍 지나 독서의 흐름을 놓치고 만다.
사실 병렬 독서가 발생하는 이유는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먼저 구입해버리는 데 있다. 나의 독서 속도는 재빠른 거북이 수준인데, 장바구니에 담는 손길은 천수여래다. 상대가 되질 않는다. 어쩌면, 병렬 독서가 아니라 ADHD 독서라고 불러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