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납치 사건
The Eyre Affair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북하우스 / 2003.7 / 초판 / 557쪽 / 195*130*31mm / 12,000원
read or trash?
★★★★★☆
홀레이!
아내 심부름으로 아내의 모교를 찾아가던 중, 모르는 곳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무슨 이벤트니 광고 전화이거니 하면서 받았더니 신문사란다. 출판사에서 말을 들었다며 갑작스레 서평을 부탁한다. 그것도 모레까지. 잠시 주저했지만 관심있는 책이고, 대충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고마 했다.
전화를 받기 바로 전, 오랜만에 교보에 들러 새 책 코너에서 집어들었던 책이 <제인 에어 납치 사건>이다. 서평을 청탁받은 책도 바로 이 책인데, <제인 에어>에 대한 각별한 감정은 제목만으로도 내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헌데 수첩에 적어둔 지 얼마 안 되어 퀵으로 받게 될 줄이야.
말했지만, <제인 에어>는 내게 특별한 고전이다. 고전문학은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 <제인 에어>는 내게 다른 고전들을 새롭게 찾아 읽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무뚝뚝하고 말붙이기 힘들었던 고전이 이렇게 매력적인 아가씨였다니! 그렇게 해서 이 시절에 읽었던 고전들은 제인 에어의 뒤를 졸졸 쫓는다.
더 읽기...
책은 내가 <제인 에어>에 기대어 기대했던 그 이상이다. 근래에 들어 이만큼 독창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책은 읽지 못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책으론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래쉬>가 있었고, 바이어트의 <소유>가 있다(물론 이 둘은 사뭇 다르지만). <제인 에어 납치 사건>은 꼭 이 둘을 합쳐놓은 것 같은 소설이다.
가까운 과거인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미래인 듯한 영국, 과거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역사를 이야기하고 느닷없이 시간대를 넘나드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게다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고전과 그 작가들이라니.
그렇다. 이 책을 가장 매력이면서도 독창적으로 만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문학에 심취하다 못해 몸의 한 부분의 되어 있다. 작가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 제 이름으로 하고 셰익스피어를 낭송하는 자판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문학범죄’(초판본 암거래와 해적판 발행 같은)가 횡행하여 ‘리테라텍’이라는 문학조사반이 따로 있을 정도.
매력적인 여주인공 서즈데이 넥스트(Thursday Next, 이름조차 매력적이지 않은가! 근데, 목요일 다음은 금요일이잖아. 어릴 적 별명이 프라이데이였을까;;;)는 이 리테라텍의 조사원이다.
워낙 복잡다미한 배경이 얽혀 있고 역사와 인물들이 좌충우돌하는 탓에 초반엔 좀 혼란스럽다. 더군다나 하루 안에 책을 읽고 서평까지 써야 한다니. 500 페이지가 넘는 두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장르소설이라는 점에 기대하는 수밖에. 헌데 웬걸, 초반부의 혼란스러움이나 두께에 대한 부담은 처음 두 챕터를 넘기면서 등 뒤로 사라진다.
<스노우 크래쉬>를 연상하게 하는 역동적인 흡입력은, 책과 범인을 좇는 순간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책에 몰두하여 넥스트, 넥스트(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를 외치게 만들었다.
'문학'이라는 장치를 절묘하게 사용하는 재스퍼 포드의 솜씨 또한 기막히다. 바이어트는 <소유>에서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여 걸작을 완성했지만, 포드는 반대로 가볍게 다루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재치와 위트로 또다른 걸작을 완성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베이컨주의자와의 논쟁, 고전을 살풋 틀었다가 다시 꿰어 맞추는(이크, 스포일러될라) 과정이라든지, 홈스의 형 마이크로프트와 DNA에 정보를 새겨넣은 하이퍼책벌레(푸핫, 이게 압권이다!)가 등장하는 등 어쩌면 곳곳에 이런 장치들를 마련했을까 하는 감탄의 연발, 연발. 그리고 분명 번역자를 괴롭혔을 언어유희까지.
당신이 <제인 에어>를 좋아하거나 문학에 빠져 있다면, 또는, SF를 좋아한다거나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다면, 또는, 액션 영화나 스릴러만 찾아 본다고 하더라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모든 것 가운데 어느 하나에라도 속한다면 이 책을 읽는 일이 너무너무 즐거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당신이 책(문학)을 좋아하고 "책(문학)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았다면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귓가에 영롱한 종소리가 울리면서 가슴은 행복으로 가득 찰 것이다. 고전을 좋아한다면 읽지 못했던 다른 고전들도 모두 다시 찾아 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고, 특히나, 오오, 우리의 <제인 에어>를 다시 펼쳐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많은 것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재스퍼 포드의 재능은 굉장히 뛰어나다. 이것이 그의 처녀작(그렇다, 처녀작이란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한 면모를 보여 주는 이 책의 후속작('서즈데이 넥스트' 시리즈는 3권까지 나왔다고 한다)이 어서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빠른 시일 안에! -虎-
ps.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번역의 문제. 송경아 정도의 감각이라면 이 책에 걸맞는 더 세련된 문장들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특히나 어휘들의 선택이나 미묘한 문장의 재미들은 살리지 못한 듯하다. 아아, 물론, 감상하는 데 문제가 있을 정도로 좋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리고 넘쳐나는 각주들(주로 작가 소개로서의)은 사실, 불필요했음.
§ 포스트잇
||
나는 눈을 감았고, 희미한 한기가 주위의 공기를 채웠다. 관광객의 목소리는 이제 마치 열린 공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박물관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전혀 다른 곳의 시골 오솔길이 있었다. (p.111)
||
"마음속에 감춰두게나, 서즈데이. 하지만 나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네. 실재와 허구 사이의 방어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한 거야. 얼어붙은 호수와 비슷한 면이 있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걸어서 건널 수 있지만, 어느 날 저녁 약한 지점이 드러나고 누군가가 거기로 떨어지는 것이지. 다음날 아침쯤이면 그 구멍은 얼어 있을 거야." (p.312)
||
"그가 원본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최대의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 지구상의 모든 판본ㅇ느 어떤 형태로든 창조라는 최초 행위에서 유래된 것이죠. 원본이 바뀌면 다른 것도 다 바뀌어야죠. 만약 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 첫 포유동물의 유전자 암호를 바꿔놓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완전히 달라지겠죠. 똑같은 일일 겁니다." (p.315)
||
"용서 같은 건 신경쓰지 말고 사는 것에 집중해요. 당신에게 주어진 삶은 짧아요.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당신 것이 될 수 있는 행복을 침해하는 시샘 따위를 하기에는 너무 짧다니까." (p.492)
||
"하지만 브론테 연맹은요?"
"샬럿은 그 책을 그들에게 남긴 게 아니지요, 넥스트 씨." (p.534)
트랙백을 보내세요
트랙백 주소 :: http://readordie.net/trackback/68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