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회사의 개발자들은 고객 답신을 하지 않았다. 메일 답신은 기본적으로 고객팀 담당이지만, 전문화된 요청이나 문의일 경우엔 각 팀에서 답신하는 것이 원칙이었음에도 유독 개발자만은 그러지 않았다. 개발자는 고객팀에게 설명을 하고 고객팀이 설명을 듣고 고객에게 답신했다.
개발자가 고객팀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고객에게도 설명할 수 있다. 여러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글 쓰는 것 자체를 꺼렸다. 글을 말과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기본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미 글은 말 이상의 의사소통 수단인데도.
또 하나, 앞에 사람을 앉혀두고 하는 입말과는 달리 눈 앞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글을 자기중심적으로 쓰기 일쑤다. 대표적인 예는 전문용어의 남발. 기술자나 개발자들이 쓰는 용어는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글쓰기는 너무 안일하고 방만하다. 읽는이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는다.
이건 모든 종류의 기술자와 개발자의 딜레마다. 기계나 잘 만지고 개발만 잘 하면 됐지 웬 글까지 고민하게 만드냐고 묻는 전문가가 있다면 난 그를 전문가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는 그 일에 관해 프로페셔널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무엇을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 많은 사람들이 '글'이라는 것에 대해 문학적 환상을 갖고 있다.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내용에 관계없이 문학적 성취에 가까워야 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다. 이런 오해는 글을 쓰는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것들에 관한 책이다. 문학적인 글이 아닌, "기능적인" 글쓰기(technical writing),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지은이는 전형적인 공대 출신의 전문가다. 그는 기술자로서는 뛰어났지만 기획서, 공문, 보고서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험까지 했다. 그런 그의 고민과 해결 방법이 이 책에 씌어 있다.
글쓰기 방법을 바꾸니 해답이 보였다. 문학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사무적인 글쓰기를 하면 된다. 글은 아름다워야 하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글쓰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문학적인 글은 잘 그린 그림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러나 그림 대신 약도를 그린다고 생각해 보자. 약도는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다. 기술자는 바로 그 '약도'를 그리듯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약도'를 그리듯이 글을 쓰라니, 정말 훌륭한 비유 아닌가! 약도는 보는 사람이 목적지를 간단하고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간소화한 그림이다. 기술자의 글 또한 그러해야 한다니 기능적인 글쓰기에 이것보다 더 나은 비유는 찾기 힘들다.
얼마나 예쁘게 그리느냐는 약도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림이 거칠고 성기더라도 정확하게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윈 있을 리 없다. 지은이는 이공계 기술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지만 모든 종류의 기술자나 개발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작법책이 아니다. 그리고 글쓰기책으로도 그다지 좋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답게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훌륭한 점이다.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야 차고 넘치게 많고, 기능적인 글쓰기라곤 하지만 기술적으로 특별히 다른 건 아니다. 단,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쓰느냐의 차이일 뿐. 인터넷 시대, 말보다는 글이 의사소통의 1차 수단이 되는 때 적절하게 활용할 만한 책이다(사서 보긴 아깝지만 ^^;). -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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