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과 불의 노래>를 다시 읽었다. 1,2부가 나온 뒤로 한참 소식이 없어서 3부 출간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인 한 분이 곧 나올 거라는 소식을 전해 주셔서 3부 나오기 전엔 되새김이라도 할 겸 다시 책을 폈다.
조지 R. R. 마틴은 몇몇 단편 외에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장르 문학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작가. 그중에서도 '샌드킹'은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단편(<토탈호러 2>에 실린)이다. 하나의 단편만으로 기억에 깊이 새겨질 만큼 인상적인 조지 마틴이지만 그것도 소수 독자층에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갑자기 엄청난 양의 팬터지가 번역되어 나오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처음 <얼음과 불의 노래>가 나왔을 때는 이러다 또 허리 잘린 시리즈를 얻게 되는 건 아닐지 우려했다. 그러다 꾸준히 여덟 권이나 되는 분량을 내놓는 것을 보고 안심했었다. 그리고 3부 소식 두절.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책의 태생이 유별난지라 사설이 길었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단편에서 느끼는 분위기와는 달리 사뭇 정통 팬터지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소설이다. 기사, 왕, 가문, 왕국이 벌이는 이 대하 드라마는 팬터지라는 말의 어감이 주는 느낌을 조금쯤은 배신하고 있을지 모른다. 작가가 이 책에서 벌이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상상'보다는 '드라마'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이 보여 주는 온갖 종류의 동화적 상상력은 이 책에 없다. <반지의 제왕>에 비하면 이 책은 반쯤 역사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실제로 마틴은 역사소설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히려 <삼국지>와 비슷하다고 할까?
그렇지만 그것은 상상력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감수성은 팬터지의 그것을 좇는다. 그리고 조지 R. R. 마틴이 펼치는 서사의 힘은 단순한 상상력을 훌쩍 뛰어 넘을 정도로 훌륭하다. <얼음과 불의 노래>에는 혼자 돌출하는 인물이 없다. '영웅'이 없다. 옳고 그름도 분명하지 않고 정의와 불의도 종이 한 장 사이에 어깨를 기대고 있다. 당연하게도, 물리쳐야 할 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악인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는 있지만). 그저 거대하게 흘러가는 왕국의 역사를 도도하게 서술한다. 그게 읽는이를 흡입한다.
인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대개의 팬터지가 그렇듯 초기에 사건이 발생하고 뭔가의 목적이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1권의 반 정도만 넘어서면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의 세계가 얼마나 꼼꼼하게 짜여지고, 또 그 세계의 인물들이 얼마나 생명력 있게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읽기를 방해하는 몇 가지만 없다면 초반의 장벽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번역은 둘째 치더라도,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유명사들을 영어 그대로 발음하는 /만행/ 탓에 소설을 읽는 내내 이게 번역인지 영어에 우리말 조사와 접속어를 붙인 건지 알 수 없는 문장과 사투를 벌여야 하니까.
퍼스트맨, 세븐킹덤, 섀도캣츠, 블러디머머스... 고유명사니까 그대로 옮겼다는 핑계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의미한 이름도 아니고 전부 의미를 지닌 지명과 인명 들인데 그런 것들을 그대로 표기했다는 것은 무책임함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서계인을 제외하고 번역자가 권마다 바뀌는(나중에는 서계인마저도 없어지고) 공동 번역을 독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게다가, 권마다 바뀌는 번역자들은 전부 서계인 번역 스쿨 출신의 '전문 번역가'. 이 책, 번역의 일관성을 믿을 수 있을까? 이런 번역의 문제는 이 작품의 가치를 삼분의 일쯤은 깎아 버리고 말았다. 3부는 과연 어떨지(교정하시는 분은 베테랑 오브 베테랑이지만 말야).
번역과 편집에 어느 정도 무책임함에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불안한 것은 2부 여덟 권이 끝나는 시점에서도 이야기가 계속 진행중이라는 것, 4부는 여전히 집필중이라는 것, 그러니 4부의 번역은 앞으로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정도일까? 자, 그건 아무려나, 어서 3부나 보여 줘! -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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