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었지만 신선한
<환성(幻城)>은 순수하게 몰입도나 재미의 면으로만 본다면 아직 여백이 많은 소설이다. 아주 매력적인 등장인물도 없고, 전개가 극적이거나 구성이 탄탄하다고 볼 수도 없다.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특별하게 내세울 만한 장점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 책이 무언가 특이할 만한 점이 있다면, 흔치 않은 중국 장르문학이라는(무협을 제외하고) 점 외에도 장르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설정 상의 새로운 스타일의 시도들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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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람이 몰아치는 날에, 허공을 찢듯 슬피 우는 산설조를 보는 날에, 붉은 연꽃이 피고 벚꽃이 지는 날에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웃는 너의 얼굴 사이에서, 무한한 세월의 갈라진 틈 속에서 항상 눈물을 흘렸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끝없이 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잔혹하면서도 가장 부드러운 감옥이 아닌가."
사실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띠지에 인용된 이 구절 하나였다. 나긋나긋한 시의 감수성을 지닌 저 산문은 마치,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관대(問人間 情是何物)……"로 시작하는, <영웅문> 삼부작의 절절한 노래를 떠오르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장르의 재미와는 또 다른 재미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중국 신무협에 서양의 판타지를 혼합한 듯한 느낌이 드는 <환성>은 장르소설이 가지고 있는 재미의 테두리를 한 걸음 더 늘려놓는다(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살짝 가라앉은 듯한 슬픔을 품고 있으면서 때로 울컥하는 감정을 삼키며 나른하게 앉은 서른의 여인네처럼, 이야기는 시종 격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1부는 그래서 장르문학의 성격을 지닌 순수 단편처럼 읽히기도 한다. 2부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장르의 모습을 띠기 시작하여 로맨스에서 판타지로, 판타지에서 무협으로, 무협에서 추리까지 이어지는 복합 장르적인 재미가 드러난다(역시 성공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환성>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시각 이미지이다. 작가 궈징밍은 장면을 시각에 익숙하거나 중요시했는지, 정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도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환성>은 이야기의 재미나 소설의 완성도로 보면 곳곳이 부족한 소설이다. 차라리(가 아니라 사실상 거의 전적으로) 같은 장르소설이라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로저 젤라즈니의 <저주받은 자, 딜비쉬>(너머, 2005)를 먼저 읽는 것이 나았을는지도. <저주받은 자, 딜비쉬>는 이미 SF작가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젤라즈니의 작품이니 이렇게 비교당하는 것이 부당하겠지만, 장르의 재미란 이런 것이다 하는 사실을 확실히 전한다. 같은 장르문학이라도 박력이 다르다.
그렇지만 그것이 <환성>을 읽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딜비쉬>는 재밌는 작품이고 이야기의 구성이나 소재를 주제에 밀착시키는 능력 또한 궈징밍과 젤라즈니를 비교할 바 아니지만 그것과 <환성>의 매력과는 무관하다. <환성>이 장르문학으로서 매력적인 이유는, 이미 틀이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 장르문학의 테두리의 한 귀퉁이를 살짝 허물고 (중국문학만의) 색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번지지 않게 덧입혔다는 것, 그래서 기존의 장르 소재들이 갖고 있는 개념들을 다른 식으로 즐길 기회를 마련했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장르문학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더 큰 매력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환성> 제1부를 쓸 때, 나는 아직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것이 희미하기만 하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오직 후텁지근한 날씨와 눈부시게 빛나던 햇살뿐이다. 당시 나는 여자 친구인 웨이웨이와 함께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혹은 피곤에 찌든 채로 키 큰 녹나무가 울창한 교정을 지나다니곤 했다. 때로는 긴 이야기를 나눴지만, 때로는 괴로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궈징밍
<환성>은 아직 어린 소설이다. 어리기에 줄 수 있는 즐거움이 다르다. 농익어 아주 달거나, 아주 매운 맛을 내지는 못한다. 절로 손이 가게 만드는 중독성은 없다. 아직 자신의 맛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시어서 침을 고이게 만들 뿐이다. 신 것은 다른 맛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성숙한 맛에 질려 있다면, 신맛은 어떤 맛보다 반가운 코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虎-
* <기획회의>에 실린 글을 고치고 다듬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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