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지아이들 31
A Fine White Dust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박향주 옮김, 김종민 그림
(뉴베리 아너 상 수상작)
문학과지성사 / 2002.10 / 초판 / 151쪽 / 214*155*11mm / 8,000원
r.o.d 평점 ★★★★☆
삶의 생채기로부터 우리는
아니, 감수성을 흥건하게 자극하는 라일런트 아줌마께서 종교 문학에 도전하셨나. 제목엔 십자가, 표지엔 예수의 얼굴이라니. 게다가 줄거리를 대강 보니 부흥회가 어쩌고 그러잖아. 에이, 종교적인 믿음 어쩌고 하는 건 재미없는데...
그래도 라일런트다,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의 뻐근한 감각이 아직도 몸에 잔상처럼 남아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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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까지는 정말이지, 아이가 순수한 종교적 믿음에 이르는 소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뭔가 분위기가 수상하지만 말야. 흠흠. 사이코 스릴러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고(;; 다 읽고 나면 왜 그런 느낌이 들었나 싶다)
피터는 아직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믿음을 자신이 속한 동아리에 조화시키지 못하는 열네 살 소년이다. 순수하기 때문에 믿음 또한 강렬하며, 그렇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믿음에 몰입할 뿐, 애매하게 불안함을 느끼지만 주변을 넉넉하게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질 나이는 아직 아니다.
맞다, 뒤로 갈수록 라일런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그녀가 <그리운 메이 아줌마>에서 보여줬던 풍성한 감수성 또한 되살아 난다. 분위기는 다르게 느껴져도 역시 그녀가 그리고 있는 것은 "삶의 생채기를 생채기로 두지 않고 감싸안는 법을 터득하는, 그래서, 그 생채기로부터 커가는" 아이들이다.
이 책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세 가지.
1. 제목
원제를 살릴 길은 없었을까? 조각난 하얀 십자가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절치 못하다. 원제의 뜻은 도자기 십자가가 아주 잘게 부서져 하얀 가루가 된 형태를 뜻한다. dust는 잘게 부서진 가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을 이루는 흙 또는 티끌'의 의미(<창세기>의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에서처럼)도 함께 갖고 있다.
2. 번역
번역도 *못마땅* 거의 명백한 오역도 눈에 띄고, 전체적으로 '어린 독자'를 의식한 탓인지 라일런트의 훌륭한 문장을 잘 살려내지 못한다.
뒤의 '옮긴이의 말'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늬들은 아직 어리니까 모르는 게 많을 거야, 이해도 못하고. 그러니까 아빠엄마 말씀 잘 들어" 이 수준이잖아!! 아, 열받아. 도대체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면서 번역한 건지. 이거야말로 아이들을 '어리석은 녀석들'로 보는 전형적인 어른의 시각 아닌가 말이다.
3. 삽화 그림
아이들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삽화를 넣어야겠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해없이 대충 장면을 설명하는 삽화 따윈 사양하고 싶다. 그림의 퀄리티를 떠나서 각 장면장면들의 컨텍스트를 죽여버리는 삽화라니(그래서 책 읽을 때 삽화쪽에는 눈길 안 주려고 무지 노력했다).
게다가. 삽화가 아저씨, 진짜 '조각난 하얀 십자가'를 그리시더군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정도의 곱고 하얀 가루"(본문 p.9)가 그렇게 큼직큼직한 조각입니까. -_-;;;;
<그리운 메이 아줌마>의 책 퀄리티가 그립다. 사계절 1318 문고는 정말 잘 만들어진 시리즌데. 우리나라에선 청소년 시장이란 게 거의 없으니. 이크, 얘기가 딴 데로 새겠군.
라일런트의 책 치고는 예상보다 반응이 없다. 아마,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색 때문이리라. 하지만 라일런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아이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종교적 믿음이라든지 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방법 같은 게 아니다.
이 책은, 라일런트는,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갑옷(또는 껍데기)을 스스로 깨고 그 상처로부터 자라나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열네 살짜리 피터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더 가슴에 가깝게 와닿는다. 먼지처럼 부서진 십자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십자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른들 가운데도 흔치 않기 때문에. -虎-
☞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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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피터야, 네가 가고 싶으면 교회에 가거라. 우리의 선택과 너의 선택은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곧 부흥회가 시작되겠지. 젊은 사람들이 설교하러 올 거야. 아마 너한테는 유익한 부흥회 예배가 필요할 거다. 하지만 피터야, 우리한테는 필요 없단다. 그건 우리 문제야. 우리 영혼은 네가 구원하지 않아도 돼. 내 말 이해하겠니?"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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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창문을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줄 몰랐다.
그리고 나에게 의지가 되는 것들이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할 때 들리는 파이프 삐걱거리는 소리. 아침에 욕실문을 열었을 때 공기 중에 남아 있던 아빠 면도 크림 냄새. 벽난로 위에 놓인 낡고 커다란 시계의 째깍대는 소리. 만화책을 들고 털썩 앉았을 때 느끼는 소파의 푹신함. 차고, 기름 냄새, 내 자전거, 늘 같은 자리에 걸려 있는 아빠의 연장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의지가 된다.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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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옷을 다 입고 신도 신은 채였다. 더플 백을 방을 가로질러 걷어찼다. 내 속이 쩍쩍 금이 가고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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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그렇게 힘든 줄 미처 몰랐다.
나는 다른 사람의 비밀을 알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의 비밀도 아빠의 비밀도 알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비밀은 아마도 삶이 그렇게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나 보다.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가 아닐 수 있다거나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나 보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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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사의 여름은 루퍼스와 나 사이를 예전보다 더 가까워지게 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똑같아서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루퍼스는 여전히 콧대 높은 무신론자며 착하고 정직한 친구다. 누구라도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천국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나는 루퍼스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이따금씩 교회에 간다. 이제 그건 매우 평온한 일이 되었다. 마치 호수에서 편안히 수영하는 것처럼.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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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침내 알게 되었다. 이 십자가 조각을 내버린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게 아님을.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인가를 영원히 잃는 게 아님을.
십자가는 너무 잘게 부서져 가루가 너무 많았다.
나는 이제 조각이 아닌 전체를 볼 준비가 된 것이다. (pp.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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